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코 샤넬 (문단 편집) === 2차 세계대전, 잠정 은퇴와 재기 === 1934년에 기업으로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다.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1939년]]엔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을 벌였다. 요즘과 비교해 가혹했던 노동 조건이었던 2차대전 이전의 사회적 기준으로도 처우가 가혹해서 벌어진 일인데, 샤넬은 이에 충격을 받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키는 대신~~ 직장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해버리고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사업을 접기로 하면서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5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나게 된다. 그 때 그녀는 샤넬 향수라인에만 집중했는데 이는 연락이 닿는 유일한 가족 때문이었다. 코코 샤넬은 3남 3녀 중 첫째였는데 그리도 싫어하는 아빠는 외도를 일삼았고, 엄마와 만날 때마다 강제로 임신을 시켜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결국 코코 샤넬의 엄마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아이들은 수도원에 맡겨졌다. 이 때 남은 자매들과 형제들 중 연락이 유일하게 닿던 형제가 있었는데[* 다른 형제도 1920년대 초반에 한 차례 샤넬에게 연락해 깡봉가 31번지에 찾아왔으나, 거액의 돈을 요구한 것에 실망해 샤넬이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그 당시 매장에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형제가 있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고.] 그가 죽으면서 30년간 코코 샤넬은 조카의 후견인을 해줬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향수 라인만 남긴 채 조카가 있는 곳으로 피신을 간 순간 조카의 연락이 닿지 않았고, 프랑스 군으로 징집된 것이 아닌 독일 나치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더군다나 포로로 잡히기 직전 결핵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위독한 상태였고, 코코 샤넬은 자신의 뮤즈이자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 '보이 드 샤넬'의 카펠이 사망한 트라우마로 인해 어떻게든 조카를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 조카는 자살한 여동생의 아들로 알려져 있고, 샤넬은 제 자식처럼 여겼으며, 나중에는 그 자살한 여동생의 딸까지 거두었다. 그녀의 종손녀이자 대녀(goddaughter)인 이 아이의 이름 역시 가브리엘이다. 프랑스 사교계를 총동원 해서 독일에 아는 연줄을 찾기 시작했고, 이 때 조카를 풀어주기 위하여 독일에 방문해 결국 어떠한 조건을 수락하고 그 조카를 풀려나게 했다. 그 조카는 프랑스군으로 징집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에 포로로 잡혀있었으니 이를 풀어주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코코 샤넬을 프랑스인들이 좋게 볼리 만무했다. 이후 프랑스에 돌아왔을 땐 히틀러의 부하와 연애했다는 사실이 프랑스 언론에 오르내렸고, 그녀는 반 강제로 칩거를 하게 된다. 40이 넘는 나이에 아이를 낳고 싶어 수 차례 시도했음에도 실패했던 코코 샤넬에게는 유일한 자식이나 다름 없었던 것. ~~코코 샤넬의 조카는 1981년 사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크리스티앙 디오르]]로 대표되는 남성 디자이너들이 화려하고 사치스런 디자인으로 패션계를 장악하고 있는 모습 비판하며 샤넬은 다시금 자신의 [[실용주의]] 철학을 내세우며 패션계에 복귀하겠다는 생각을 품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철저히 실패했다. 그 이후 ~~염치도 없이 자신때문에 죽을뻔 했던~~ 예전 동업자였던 피에르 베르트하이머의 자금과 사업 지원을 받아 드디어 1954년 샤넬 컬렉션을 선보이며 패션계에 돌아온 그녀였지만, [[프랑스]] 언론들은 진부하고 고루하다며 그녀의 컬렉션에 혹평을 쏟아놓았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반대로 '패션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할리우드]]의 스타들 또한 샤넬의 옷들을 애용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샤넬의 패션은 다시금 유행의 중심이 되었으며 코코 샤넬도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또 트위드라는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패션을 미국에서 유행시켜서 패션계에서 도태되는 일을 면했다. 이 역시 사실 불편한 사실이 숨어있는데 미국은 코코 샤넬의 옷을 가장 많이 헐값에 복제해 간 전과가 있었다. 무단으로 디자인을 도용해 3~6달러의 헐값에 팔았지만 코코 샤넬은 자신에게 바지를 착용하지 못하게 했던 상류층들의 4년간의 괴롭힘을 알았기에, 미국 여성들의 '편한한 옷'을 위해 저작권 소송 등을 일체 포기하고 여성의 자유로운 의복을 위하여 아예 신문에 대놓고 헐값에 카피 옷을 광고하는 것도 눈감아주고, 40년대 후반 미국 여성들의 사회 진출로 샤넬의 옷을 많이 사랑했기에 아예 샤넬 옷 따라 만들기 키트까지 집집마다 팔았다고 한다. 당시 잡지를 보면 미국에서도 샤넬이 있는 집과 없는 집으로 나뉘었고, 집집마다 옷을 따라서 만들어 입으면서 샤넬 덕분에 미국에서 여성들이 직업을 가질 때 '편한 복장'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식의 평가는 사실 자신의 스파이 활동을 모두 알고 있던 미국에서 문제를 일으켜 완전히 매장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